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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마하기/근황, 일상다반사

2023년 11월 - 슬럼프와 구원

by J.5 2023. 12. 3.

11월은 조금... 힘든 달이었습니다.

일단 10월부터 이어져 온 흐름이... 트럼본과 트럼펫을 병행하고 난 뒤에, 트럼펫'만' 다시 불면서 전반적인 폼이나 암부셔를 유지할 수 있을까? 했는데, 고생이 꽤 많았어요. 거기에 트럼펫 3 + 트럼본 1 편곡으로 곡을 하나 불어볼까 했는데, 깔끔한 완주가 어려워서 매일 30+초 롱톤을 하려다 보니, 뭔가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11월 초에, 예전 글에 썼던 새 피스들을 테스트 해 보았는데, 예상과 너무 달라서 허탈함, 낙담 같은 것이 꽤 세게 왔습니다. 

제가 십 수가지 GR 피스들을 불어오면서 가장 '아무 생각없이' 자연스러웠던 것이 e65MX 였습니다. 무려 10년 전에 구입한, 처음 불어본 GR 피스들 중 하나였지요. 그래서 이것저것 테스트는 해오면서도, 한켠에는 'e65 림 + 안쪽에서 빠르게 떨어지는 알파 앵글' 이 나한테 잘 맞는구나 하는 생각은 담아두고 있었거든요. GR 측이 회사를 양도하거나 문을 닫으려는 상황에서, 마침표를 찍는 느낌으로 큰 맘 먹고 구입한 거였는데... '그 동안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나도 그때와는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오더군요. 입술이 안잡히는 상황이어서 더더욱, '피스까지 이러면 어쩌란 말이냐...' 같은 심경이 들었던가 봅니다.

거기에 나팔 외적인 것이지만, 친구들과 예전에 즐겼던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의 월드 챔피언십 (일명 '롤드컵')이 11월 동안 본격적으로 진행됐습니다. 호주에 온 뒤로 하기는 커녕 깔지도 않은 게임이었는데, 어째선지 이번에 같이 하던 친구들과 (카톡으로) 열을 올리며 홀린듯이 경기들을 관전하고, 관련 글들을 읽고 하다보니... 머리 속에서 음악이 사라졌습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저는 10월이 집 계약을 하는 시기고, 이어지는 11월에 이것저것 지출이 크게 나가는 달이거든요. 금전적인 지출 + 위의 일들을 겪으며 온 '현타' 혹은 번아웃 + 롤드컵에서 비롯된 일종의 '도파민 쇼크' 때문에 일어난 일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에서 친구들이랑 어울리며 놀던 시기로 돌아간 느낌 때문에 어쩌면 더욱...?

몇 주 동안 만족스러운 연습을 못하고, 몇몇 날은 아예 안하거나, 부족한대로 마우스피스에 입만 잠깐 대보는 날도 있었습니다.

제 2의 상하이 대첩을 이뤄낸 한국의 T1
7년만의 우승!

4월 이후 휴가 없이 계속 달려와서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것도 있고... 일단은 정신적으로 쉬어주면서 디톡스(해독)을 좀 하고, 뇌도 평상시처럼... 좀 '지루한' 상태로 다시 돌려놔야 겠구나 했습니다.

11월 19일에 결승전이 끝나고, 조금씩 조금씩,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자극이 사라지고 다시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날씨의 기복이 굉장히 심했어요. 쨍하다가, 비가 막 오다가, 또 맑아졌다가...

 

제가 소시적부터 꾸준히 고생하고, 요 근래 들어서 더욱 심해진 것이... 수면 부족입니다. 병이라기 보단 습관이나 기질의 문제에 가깝지만, 최근에는 좀 더 심해진 느낌. 

롤드컵이 끝나고 2주 뒤의 화요일은, 아침부터 먼 현장에 미팅을 가야 해서 새벽 5시쯤 일어나야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잠깐의 졸린 타이밍을 놓치고 나니까 계속 잠이 안와서, 결국 그냥 밤을 새고 나갔지요. 그래도 한 점심 때 쯤 까지는 괜찮은데, 오후에는 아니나 다를까 극심한 졸음이 쏟아지더군요. 비몽사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왜인지, 어딘가 공원을 찾아서 연습을 하고 싶더군요. 몸이 힘들 때 생존 본능이 발동되는 것 처럼... 사실 요 근래에 계속 '탁 트인 야외에서 불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사무실에서 연습하는 것에 여러모로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 또 새로운 곳이 없을까 싶어서 검색하다가, 위치도 좋고 리뷰 영상에 무려 야생 캥거루들이(!) 보이는 곳이 있길래, 한번 가 보았네요.

이렇게 보면 그냥 작은 동네 공원 같지만...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다리에 올라 양 옆을 보면 저렇게 펼쳐져 있고,

다리 왼편으로 보이는 저 쪽에 갈 수 없을까... 해서, 왼쪽에 보이는 이 공터를 지나 뒷길처럼 몰래 나 있는 곳을 돌아 내려가 보니

유레카...!

이 곳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축축하고 바람 부는 날에는 특히 더 감성이 올라오잖아요? 거기에 약간은 멍한 머리로 가만히 앉아서 연습을 하다 보니, 뭔가 몽환적인 기분이 조금 들었습니다. 너무 좋은 거에요. 오랜만에 정말 푹 빠져서 잘 불었습니다. 선선하고 탁 트인 곳에서의 야외 연습만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데, 저는 지금까지도 연습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이, 서울의 종묘 광장 공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해가 조금씩 지기 시작하는 가을 날이였던가... 어쩌다가 시간이 남아서 벤치에 앉아 한시간 쯤 연습을 했었는데, 하늘 높이 사라지는 청명하면서도 헛헛한 그 느낌, 소리가 너무 좋았습니다. 이 곳은 약간... 먹먹하면서 촉촉한?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야외에서 느낄 수 있는 개방감이나 드라이한 울림은 둘 다 같았구요.

제가 최애로 꼽는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마치 그 풍경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크로스 플러스 무비 에디션 (1995)

슬슬 마칠 시간이 되어가서 이 작품의 주제곡을 가만히 불고 있으려니, 빗방울이 조금씩 툭 툭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곡의 끝이 멀지 않은 지점이어서, 가랑비를 맞으며 나머지 1~2분을 마무리하고 짐을 싸서 일어났습니다.

이 공원 근처에 제가 종종 가는 베트남 식당이 있어서, 따듯한 월남 국수를 한그릇 먹고 하루를 마무리하는데... 뭔가 구원 받은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더군요.

긴 하루의 마무리

 

그리고 너무 좋아서 이틀 뒤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날이 비교적 맑으니 또 다른 느낌이더군요. 도중에 자전거 타던 동네 꼬마아이들이 한번 와서 인사하고 가고... 연습하는 자리에 앉아서 보이는 시간의 경과를 같이 느껴보세요... ^^

이 날은 게임계의 명반 중 하나인 파이날 판타지 IV의 켈틱 문 (Celtic Moon) 앨범이 생각났습니다.

트럼본과 혼용하면서 왔던 암부셔와 주법의 문제는 이제 어느정도 파악이 되어서 조금씩 다시 잡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참 끝이 없지요... 하하.

향후 일들에 관해서도 전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일단 당분간은 이대로 유지하게 될 것 같아서 다음에 적절한 시기를 보아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12월이네요. 모두 건강 유의하시고 2023년의 마지막 달을 잘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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