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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a Playa

잉그리드 젠슨 (Ingrid Jensen)

by J.5 2012. 12. 29.

마리아 슈나이더 빅밴드 - "Pretty Road" 中

잉그리드 젠슨. 1966년[각주:1] 1월 12일 뱅쿠버 生.


"여성 재즈 트럼펫터"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첫 손에 꼽을 아티스트! 대중가요 바깥에 서 있는 뮤지션으로서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는 않지만, 트럼펫을 부는 여성들 중 가장 독보적인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잉그리드 젠슨 아닌가 싶다.


뱅쿠버에서 해협 건너편에 위치한 나나이모(Nanaimo)에서 자란 잉그리드 젠슨은 어머니가 피아노 선생님이었고, 여동생 크리스틴 젠슨 역시 유명한 색소포니스트인, 음악 가족의 일원이다. 어릴 적부터 오스카 피터슨 등의 재즈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자랐고, 처음 접한 악기 역시 피아노였지만 딱딱한 피아노 교사의 교습방식이 싫어서 (어머니가 직접 가르치지는 않은 듯) 곧 그만 두었다는데, 그 뒤 학교 밴드에 들어갈 때에 그녀의 부모가 "얘는 성격이 선머슴같으니까 트럼펫 하면 잘 어울릴거야"라는 식으로 밴드 장과 미리 공모를 해놔서(...) 트럼펫을 잡게 되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잉그리드였지만, 처음에는 트럼펫 특유의 자기주장만 시끄럽게 내세우는 듯한 느낌 때문에 때려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쳇 베이커, 클리포드 브라운, 마일스 데이비스, 클락 테리, 루이 암스트롱 등 유수 재즈 트럼펫터들의 연주를 들으면서, 대가들이 그들의 퍼스널리티(personality)를 트럼펫에 담아 풀어내는 것을 보고선 이윽고 트럼펫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된다.[각주:2]


그 뒤 잉그리드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말라스피나(Malaspina)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장학생으로 버클리 음대 석사과정에 들어가 로리 프링크(Laurie Frink), 조지 가르조네 (George Garzone), 프레디 허바드(!) 등에게 사사하고 뉴욕에 둥지를 틀게 된다. 하지만 경쟁적인 분위기에 피곤해하던 그녀는 이듬 해에 오스트리아의 브루크너 음악원에서 재즈 트럼펫 교수 자리를 얻어 유럽으로 건너가는데, 이 때 그녀의 나이가 25세로, 당 음악원에서 최연소 교수로 재임했다고.


- 그녀의 불꽃같은 즉흥연주를 들어보자! -


젊은 시절

교육자로서의 시각 뿐 아니라, 다른 문화의 체험, 유럽의 정상급 아티스트들과 클락 테리 등 미국에서 간간히 건너오는 대가들과의 교류 등, 해외에서의 체류는 잉그리드 젠슨의 견문을 넓혀주는 유익한 경험이 되었고, 솔로 아티스트로서도 독일의 엔야(Enja) 레코드와 계약을 맺게 된다. 그리고 수년 뒤,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성 단원들로만 이루어진 빅밴드 "DIVA", 그리고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마리아 슈나이더 재즈 오케스트라 (Maria Schneider Jazz Orchestra) 등과 함께 활동하며 운신의 폭을 넓힌다.


그 뒤 지금에 이르기까지, 잉그리드 젠슨은 자신의 개성을 중요시하면서도 다양한 정상급 아티스트들과 작업을 해나갔고, 캐나다의 그래미라 불리우는 주노 시상식에서 수상, 뉴욕 재즈 저널리스트 협회상 후보, 다운비트 비평가 투표에서 '좀 더 널리 알려져야 할 아티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는 등, 화려하진 않지만 충분히 다채로운 성과를 올리면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으로 잉그리드 젠슨을 보고 '아!' 싶었던 것은, 그녀의 "바다에서 (At Sea)"라는 곡을 들으면서였다: 



지금까지의 관습에서 자유로운, 그녀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녀의 음악! 나긋하면서도 넉넉한, 약간은 앰비언트 음악스러운... 블루와 그린이 둘 다 들어간 푸른 빛 같은 느낌. 잉그리드 젠슨이 그녀만의 독자적인 영역에 서서 새로운 것을 들려준다는 생각이, 여성 재즈 트럼펫터들을 알아보는 것이 헛되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녀의 인터뷰 등을 보면, 소위 남성적이라 할 수 있는 수직적인 개념이나, 남들의 규정/프레임 안에 갖히는 걸 강하게 의식하고 피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냥 나는 나'라는, 자신의 개성에 담담하게 천착하는 이런 모습들이 그녀만의 느낌을 자연스레 음악으로 표현해낼 수 있었던 이유 아닌가 싶다. 이제는 자신이 '재즈계' 에 속해있는 건지도 의아스럽다는데, 이는 현대 재즈의 정체성이 워낙 모호한지라 충분히 수긍이 가는 부분.



잉그리드 젠슨의 이런 '오리지널리티' 추구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날 색소포니스트인 마이클 브렉커(Michael Brecker)가 다가오더니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일전에 라디오에서 누가 트럼펫을 연주하는 걸 듣는데 도저히 누구인지 감이 안 오는거야. 그런데 연주가 끝나고 나니까 아나운서가 그게 너였다고 그러더라고. 잉그리드 젠슨!" 이 말을 들은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부끄러움과 겸허함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아마 '자신만의 캐릭터가 없다' 라고 생각한 것 아닐까. 그 때를 전후로, 잉그리드는 더 이상 자신이 내키지 않는 연주회장에는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금전적으로는 상당히 고생하게 되었지만, 반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술회하는 그녀.


음악적으로 강한 유대감을 느꼈던 마리아 슈나이더와의 만남 역시도 작곡을 하고 자신의 감성을 풀어내는 데에 있어서 잉그리드 젠슨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슈나이더가 어느 날 문득 건넨 '다른 사람인 척 할 필요 없어, 넌 그냥 네가 되면 되는거야' 라는 말도 잉그리드에게 큰 지표가 되어준 듯.


- 소녀같은 풋풋함과 설레임... 따스한 봄날의 풀밭같은 마리아 슈나이더 -


교외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슈나이더와 잉그리드의 음악은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 느낌에는 다른 데가 있는데, 왠지 야트막한 전원에서 자랐을 것 같은 마리아 슈나이더의 음악과는 달리, 뱅쿠버의 물가에서 자랐다는 잉그리드 젠슨의 음악은 마치 물빛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위에 첨부한 "At Sea"같은 경우도, 드러머인 남편과 함께 떠난 알래스카 보트 여행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틀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잉그리드 젠슨의 자유로운 탐구심은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녀가 추천하는 책들을 보면 흥미롭게도 자아성찰에 관련한 책들이 많다. 자기계발서의 원전이라고 불리우는 맥스웰 몰츠 박사의 "성공의 법칙", 독일인 철학교수가 일본에서 활을 배우면서 '선(禪)'에 접하는 이야기인 "Zen in the Art of Archery"라던가, 나아가 달라이 라마의 저서까지.[각주:3] 심지어 잉그리드 젠슨의 연습 방식에 대해 인터뷰한 글에 따르면 신기하게도 그녀는 인도의 "탐부라"라는 악기를 전자악기화 한 묘한 물건(...)을 연습에 접목시키는 걸 좋아한다는데... 직접 해 보기 전에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따라해 본 인터뷰어가 극찬(?)하는 것을 보면 나중에 한번 시도해보고 싶다. 연습에 관해서는 이후 동영상 시리즈를 내놓을 계획도 있는 모양이던데, 어찌 될지 궁금하다.


각종 연주회나 워크샵, 마스터클래스, 앨범 작업 등, 커리어가 궤도에 오른 이후 꾸준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잉그리드 젠슨. 여성 재즈 트럼펫터로서 그녀는 누구보다 최전방에 서서 담담히 걸어나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캐나다의 풍성한 자연을 닮은 그녀의 음악이 어디로 계속해서 나아갈지 궁금하다.






  1. 1966, 1967, 1969년 생으로 다르게 표기된 곳들이 있는데, 정확히 무엇이 맞는지는 불명. [본문으로]
  2. 같은 캐나다 출신의 여성 재즈 뮤지션인 다이애나 크랠의 활약을 보는 것도 힘이 되었다고. [본문으로]
  3. 잉그리드 젠슨의 추천 서적 목록: http://talkingtrumpet.wordpress.com/2011/04/16/interview-ingrid-jensen-on-practic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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