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를 보면 가장 꾸준히 올라오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 첫 악기를 사려고 하는데 어떤 악기를 사야 하나요?
- 처음엔 초보용 악기로 사야 할까요, 아님 처음부터 고급 악기로 할까요?
- 이번에 큰맘 먹고 악기를 업글하려고 하는데 추천 부탁드립니다.
등등의 글입니다.
자! 난 세세한 건 모르겠고 답을 내놓아라! 하신다면 다음과 같이 추천합니다:
- 초보용 첫 악기: 야마하 2 시리즈 (시대별로 2320, 2330, 2335 등)
- 고급 악기: 바하 스트라디바리우스 180 / 37 - 스탠다드 (중후) 혹은 LR (날렵) ※상대적인 비교입니다.
야마하 2 시리즈 추천 이유:
- 야마하의 기술력과 품질관리는 세계 최고라고 해도 무방. 저렴하다고 허투르게 막 만들어지지 않음.
- 기능적으로도 가장 무난하고 원만함 - 야마하는 특출난 강점이 없어도 전 항목에서 80점 이상은 하는 스타일.
- 중고로 구입하기에도, 되팔기에도 수월 - 물론 대미지나 밸브/피스톤 액션 확인은 필수.
- 단점: 개성이 밋밋하다거나, 소리가 (1 시리즈보다는 나아도) 여전히 가볍게 느껴질 수 있음.
바하 180/37 스트라디바리우스 추천 이유:
- 나팔 세계의 '골든 스탠다드' - 압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보편적인 모델.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음.
- 단점: 뽑기운 필요. 최근 부품 제조사들의 운영악화로 인해 신품 구입이 어려워짐.
- 끝! -
... 이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이렇게 마치기엔 너무 짧은거 같기도 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다 하자니 너무 길어질 거 같고... 일단, 위처럼 간단한 답을 원하는 분들께도 생각해보실 만한 이야기는 잠깐 써 볼까 합니다.
아마도 고1 무렵 아니었나 싶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던 저는 '재즈 온 시네마'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을 흥미가 동해 구입하고 처음 쳇 베이커를 접했습니다. 세월을 거치며 저도 모르게 점점 그의 음악과 소리에 빠져들었고, 나팔이라는 악기에 대해서도 참 불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느 날 검색해 본 인터넷의 짧은 글귀는, 저를 빠르게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주 어려운 악기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시간을 들여 연습하지 않으면 불 수 없다.
당시에 제가 파악하는 저 자신은, 무슨 일에도 호기심이 왕성하고, 일단 시작하면 곧잘 잘 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대강을 알게 되면서 금방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지도...? INTP 특성일까요 하하) 그런데 무언가를 매일 끈기있게 해야 한다는 부분에서, 영 내 이야기는 아니겠구나 했지요. 그 글을 읽지 않았거나, 혹은 읽었더라도 무작정 불어보았으면 삶의 궤적이 얼마나 달라졌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살면서 돌아보면 조금은 아쉬운 순간 중의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 20대 중후반, 애니메이션 석사 과정을 하던 저의 머리에 무심코 떠오른 졸업작품의 주인공은, 나팔을 부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팔을 그리려고 인터넷을 뒤져보면, 한계가 너무 명확했습니다. 일단 사진의 앵글이나 조명도 대부분 한정된 것들밖에 없었고, 브랜드나 모델들도 천차만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에이씨... 이렇게 된 거, 이 참에 그냥 하나 사자!
두둥...
그래서 근처 동네에 있는 악기점에 다짜고짜 찾아가 보았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사장님께 물어보니, 야마하 1335와 바하 TR600이 있다며 추천해 주시더군요. 마침 둘 다 카운터 앞에 박스들을 쌓아놓고, 시연도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불어봐도 돼요?"
"그럼, 물론이지!"
"어떻게 부는 거에요?"
"엠~ 하고서 이렇게 입을 잡고, 한번 후 불어보렴."
꼼지락 꼼지락... 몇 번의 시행착오 후 ...
빠아암~
"...!!"
제 첫 소리는 1옥 도였습니다.
지금 들으면 어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소리는 컸습니다. 공명이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 순간에 느꼈던 그 반짝이고 두둥실한 감흥이란! 눈 앞의 시야는 무슨 몽환적인 필터를 씌운 것처럼 번지는데, 별이 반짝반짝 하고,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더군요.
여기까지가 ~ 아마도 처음 밝히는 ~ 저의 나팔 첫 경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야마하 1335를 불면서는 전혀 그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당시에 느끼기에도 너무 소리가 가볍고 떼떼거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지금처럼 그냥 인터넷으로 좋다 해서 야마하 1335를 사고, '아 나팔은 원래 이런 건갑다' 했으면, 어쩌면 지금처럼 나팔에 빠지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바하 TR600의 그 구수하고, 두텁고, 풍성한 소리가 너무 좋아서,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불고 또 불었습니다.
자기객관화는 늘 어렵지요. 저와 닮은 조카 녀석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가만히 돌아보건데, 아마도 저는 이런 (호불호) 쪽으로 좀 예민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은지는 아시겠지요?
"야먀하는 별로니까 바하를 사라!"
물론 그런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좋아하는 소리, 조금 오버스럽게 말하자면 '영혼을 울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이런 부분에 대한 민감도 역시 다 다를 수 있고, 또 예민하다고 해서 꼭 더 좋고 잘하라는 법도 없습니다. 반대로 보면 현상에 덜 휘둘리게 되니까, 자기 고집이나 호불호가 약한 사람이 좀 더 우직하게 연습을 하고 실력을 늘려나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그 악기를 불면서 무엇을 느끼는지는, 세상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온전한 그 사람의 몫입니다. 그래서 이런 추천을 원하시는 분들께 항상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추천은 할 수 있지만 일단 본인이 직접 가서 불어보시라. 는 것입니다. 못 불면 적어도 대신 불어주거나, 혹은 가르쳐주거나 도움 될 수 있는 사람을 찾던가 말이지요. 나팔은 특히나 악기의 특성상 연주자의 머릿 속 음상이 굉장히 중요하기에, 이 부분은 한 번 쯤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많이 보편적인 개념이 된 것 같지만, 예전에 '사람마다 맞는 악기가 다 다르고, 본인에게 맞는 악기를 선택했을 때 90%는 그 악기로 프로 수준에 근접할 수 있다.'라는 요지의 책 소개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찾을 수가 없네요 😂). 이 개념은 원래 어떤 악기를 고를지의 문제이지만, 초점을 좁혀서 보면 한 악기 종류 내에서도 본인에게 맞는 모델이 있고 아닌 모델이 있습니다. 불 때에 온 몸으로 느껴지는 그 느낌, 그리고 소리...!
이번 포스팅이 간단한 해답을 원하는 분들을 위한 글이라고 구분한다면...🤔 글을 마치기에 앞서, 누가 불어도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프로급 나팔도 몇 가지 더 추천드립니다 (작성하다보니 계속 늘어나네요...ㅡ.ㅡ;). 이건 일반적인 기준이라기 보다는 아주 개인적인 추천입니다:
쉴케 (쉴키) S32HD
쉴케 브랜드는 세계에서는 바하-야마하와 함께 3대 브랜드에 들어가는 만큼 접근성도 용이합니다. S32HD는 쉴케 나팔들 중에서는 살짝 무거운 축에 속합니다. 직접 소장한 적은 없지만, 틈틈이 불어본 느낌으로는 종결 (지름 종결) 나팔로 삼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제 취향에는) 부족함 없이 밸런스가 참 좋다고 생각하는 모델입니다.
플립오크스 와일드씽 (Flip Oake's Wild Thing)
제조사인 캔스툴이 폐업한 이후 아마 신품으로는 구입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징이라면 벨이 펼쳐지는 각도 크고, 전반적으로 호흡을 더 먹는 편입니다만,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는 범용성, 그 폭이 그만큼 크고 유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원시원한 기본 특성상, 이 글에 언급하는 다른 모델들 보다는 상대적으로 클래식에서 먼 편입니다.
스톰비 엘리트 (Stomvi Elite)
가볍고, 쉽고, 빠르게 불리면서도 클래식적인 선선한 울림이 묻어나는 나팔입니다. 아래의 스파다 모델과 더불어 좁고 기민하게 불리는 스타일. 다만 두터운 코어를 원하시는 분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담스나, 요즘 주목받는 로터스 트럼펫도 개인적으론 이런 성향이 조금 느껴지는데... 음정을 잘 맞추기 위해서 어느 정도 희생해야 하는 부분인 건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야마하 9335 CHS (시카고), 8335(II)RS25TH 25주년 기념 모델
야마하는 접근성이 좋은만큼 8, 9 시리즈에서 충분히 직접 시연하고 고를만한 여건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제 개인적인 픽은 9시리즈의 시카고 모델입니다만, 스스로도 8~9시리즈는 좀 더 충분히 탐험해보고 싶네요. 품질의 야마하인 만큼 어느 모델을 불어도 감탄할만한 기술력과 일관성,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야마하 제노(Xeno) 25주년 기념으로 발매된 트럼펫인데, 우연한 기회에 불어봤다가 혀를 내둘렀던 녀석입니다. 리버스 리드파이프이지만 저렇게 곡선형으로 더블 브레이싱을 구현해 놓은게 외형적 특징인데... 소리는 야마하 특유의 무기질적인 선명함(깔끔함)과 더불어 살짝 가벼운 편이긴 하지만, 불리는 게 너무 좋아서...^^ 바로 밑의 스파다 트럼펫과 더불어 잠깐 불어보고 감탄했던 걸로는 투 톱으로 꼽을 것 같네요. (위의 스톰비 엘리트도 같은 계통의 트럼펫이라는 느낌이긴 한데 음... 조금 더 빛깔이 뚜렷한?)
스파다 - 바하 43G(☆?)벨 + 쉴케 바디
이건 기억이 나서 적기는 하지만, 아마 구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 서초동의 한 가게에서 다른 분의 것을 잠깐 불어봤는데 많이 감탄했었던 모델입니다. 벨이 바하 43G에... 아마 스타벨(경량형)이었던거 같긴 한데 가물가물하네요. 바디가 쉴케인 것도 주인 분이 약간 긴가민가 하면서 말씀해주셨구요. 스파다는 주문자가 원하는 파츠를 가져다가 본인들이 커스텀으로 재구성(?)하여 만드는 곳이라, 옛날에 찾아보았을 때는 몇가지 정해진 조합들이 웹사이트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딱히 그런 건 없는 것 같군요. 개인적으로는 맨 위의 쉴케 S32HD와 더불어, 종결 나팔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바하...
그리고 역시 바하입니다. 사실 바하 내에서도 조합이나 모델을 굉장히 다양하게 할 수 있는지라, 그 안에서만 해도 어지간한 '스타일'의 나팔은 다 만들어낼 수 있고, 또 어떤 모델을 조합하더라도 세계적 스탠다드가 된 바하 특유의 울림과 소리가 어느 정도는 간직되기 마련입니다. 어찌 되었든 가장 대표적인 나팔 브랜드로서의 접근성도 무시할 수 없구요. 다만, 바하에 언제나 따라붙는... 품질관리와 뽑기운에 대한 부분도 어느 정도는 감안을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영어권 게시판에서 누군가가 적은 한 마디가 항상 기억에 남더군요. "잘 만들어진 바하는 세상 어떤 나팔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명기다." 라구요.
자동차 업계에서 나온 명언이 있지요? '튜닝의 끝은 순정이다.' 트럼펫 계에서 바하는 그런 교과서적인 느낌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워낙에 흔하다 보니 개인적으론 손이 가지 않지만요! 😝 여담으로 칼리키오의 모델 구분, 조합 방식이 의외로 바하와 거의 같습니다.
라숀 로스 (Rashawn Ross)의 바하 180S37 시연
※ 다양한 회사들이 바하를 벤치마킹해서 내놓는 모델들이 있는데, 브랜드만 믿을만하면 이런 나팔들도 나쁘지 않습니다. 최근에도 캔스툴 버전인 모델 1537을 불어보았는데, 여건만 괜찮으면 하나 사고 싶어질 정도로 마음에 들더군요.
곧 2부 글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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