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서 금관 악기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Diefe's Brass Repair를 다시 한번 찾았습니다.
한국에 다녀오는 친구가 있어서 가는길에 짐을 좀 부치려고 했는데, 보내기 전에 칼리키오 1S/2 점검할게 있어서 들고 갔습니다. 밸브 쪽에 도금이 조금씩 벗겨진 부분은 서초동 스노우뮤직에서도 진단받은대로 녹(red rot)이 아닌 단순 도금유실이라고 해서 일단 다행!
또 한가지는 밸브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서, 호주 내에서 밸브잡을 해주는 곳이 있다 하여 맡겨볼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일단 상태를 한번 보겠다고 주인장인 에드 씨가 나팔을 들고 가더니, 뭔가 놀란 기색으로 와보라고 합니다.
관 압력을 재는 기계로 테스트를 해보는데, 2번 밸브가 압력이 떨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3번은 꽤 짱짱하고 1번은 2번보다는 압력이 덜 떨어지는데... '자 이제 이걸 봐봐' 하고 1+2번을 눌러보니 2번만 눌렀던 것에 비해서 압력이 1번에 맞추어 올라갑니다. 2번 압이 헐겁다면 2번만 누르나 1+2를 누르나 다 헐거워야 될텐데...
'나도 이런건 처음 봤어. 연결 관 쪽에 문제가 있는 건가...?'
결국 밸브잡은 위탁하기로... 사실 단순 가격만 생각하면 미국에 보냈다 받는 쪽이 좀 더 저렴하기는 합니다만, (호주) 국내에서 처리하는게 장거리 운송보다는 아무래도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문제가 있으면 한번 같이 봐달라고 했습니다.
간 김에 수다를 떨다보니 위탁판매 중인 피콜로 트럼펫이 있는데 혹시 살 사람 있으면 말해달라고 합니다.
겟젠 이터나 4밸브 모델인데 흐음... 연식은 꽤 되었지만 많이 불지 않은건지 상태가 훌륭하네요. Eb 조인데 한번 불어봤더니 운지법이 약간 알쏭달쏭합니다. 상대음으로 1옥솔이 개방 운지가 아닌 듯한...? 🤔
짱짱하고 견고하니 소리도 잘 나고... 무엇보다 고음이 걸리는 느낌이 훨씬 또렷하고 상대적으로 수월해서, 피콜로 트럼펫으로 고음 느낌에 익숙해진다고 하는 훈련법이 그럴싸 하겠구나 싶어집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피콜로 트럼펫에는 크게 흥미가 없는지라 잠깐 불고 내려놓는데... 에드 씨가 물어봅니다. '샤걸(Schagerl)거 비싼 나팔들 한번 불어볼래?' 오우 베이비...❤️
샤걸 (샤갈) 라인업
진열장에 신경을 안쓰고 있었는데 돌아보니 이렇게 악기들이 주욱 있더군요. 얘기를 들어보니 샤걸 측에서 홍보 목적으로 가게들을 돌아가면서 고가 악기들을 임대해 준다고... 아마도 호주에 들어와 있는 해당 모델들은 이게 다일수도 있다고 하니 으음~ 흥미가 동합니다. 모두 샤걸 특유의 피스톤-로터리 밸브를 쓰는 모델들이네요.
킬러 퀸 (Killer Queen) - 매트 실버 마감
첫 타자로는 킬러 퀸. 일단 손잡이에서부터 리시버 / 리드파이프 끝까지 길이가 긴 것이 뭔가... 살짝 당혹스럽습니다. 아마 일반적인 Bb 트럼펫보다도 더 길지 않나 싶은데, 익숙한 느낌으로 입에 가져다 대다가 이빨 깨질 뻔(...).
피스톤+로터리 밸브 경험은 이게 처음인데, 과연 민첩하고 똑딱이는 느낌이 좋습니다. 피스톤을 누를 때의 조작감, 반응, 피드백 같은 것들이 전부 훨씬 빠르네요. 쭉 뻗은 리드파이프와 아마도 얇은 두께의 재질 덕분인지 소리도 굉장히 잘 나고, 톤 역시도... 플루겔혼틱한 느낌은 있으면서도 전반적으로 가볍고 산뜻한 것이, 경량형 트럼펫과 경량형 플루겔혼의 중간 같은 느낌입니다. 마감 덕분에 더 그런지 눈이 뽀드득거리는 듯한 느낌이 좋네요. 기존 악기들과는 약간 다른 궤의 물건이긴 합니다만, 실용적으로도 충분히 좋아보입니다.
레이븐 (Raven / Raweni) - 빈티지 랙커 마감
실제로 마주하면 사진으로 보기보다는 마감 느낌이 꽤 멋스럽습니다.
제임스 모리슨이 이 악기 개발과 관련해서 했던 이야기를 근래에 한번 보았는데, 대략적으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모든 나팔은 세게 불면 소리가 밝아진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재질은 소리를 작게 낼 때에 얼마나 부드럽냐에 영향을 미치고, 벨의 플레어(벌어지는 모양)은 나팔을 점점 더 강하게 불 때에 소리가 밝아지는 임계점에 영향을 준다. 나는 이 모델이 그런 음색적인 스펙트럼을 전방위적으로 커버할 수 있는 악기로 만들기를 원했다.
이 얘기가 떠올라서 한번 작고 부드럽게 → 크고 밝게 까지 불어서 테스트를 해봤는데, 와아... 속으로 감탄이 나오더군요. 제가 불어본 어떤 악기보다도 그 음색 변경이 부드럽게 이루어집니다. 마치 그라데이션 느낌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이건 직접 불어보아야 느끼실 수 있을 법 합니다. 그리고 아주 궁금했던 부분을 잠깐 테스트 해 보았는데, 이런 피스톤+로터리 밸브로도 하프밸브가 가능하긴 하더군요.
역시 기존의 악기들과는 조금 다른 물건이긴 합니다만, 이 녀석은 진짜 물건이었습니다. 킬러퀸-레이븐-스파이더 셋 다 공통적으로 음상이 조금 좁다는 (하지만 섬세하고 견고, 명료한) 느낌 때문에 개인적인 취향과는 조금 달라서 확 구매욕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런 부분에서 취향이 맞으신다면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뭐랄까... 성능적으로만 따지자면 좀 차원(?)이 다른 악기네요. 개인적으로 벨 부분만 조금 바꿔서 나온다면 시장 판도에 상당한 영향을 불러오지 않을까 싶기도...?
스파이더 - 매트 빈티지 마감
디자인의 과격함이나 마감은 가장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습니다만, 악기로서는 음... 거두절미하고 얘기드리자면 별로였습니다. 꺾이는 곳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센터로 완전히 뚫으면서 불지 않으면 소리가 안 걸립니다; 뚝 뚝 덩어리져서 소리가 나간다고 해야 하나... 제가 들고 있던 ACB H3S 피스가 깊어서 그런가 하고 가게에 있는 5C 정도 피스도 써봤습니다만 마찬가지더군요. 미국의 트렌트 오스틴이 시연하는 영상을 보니 이 분도 좀 고생하시는게 보이네요 크크...
제임스 모리슨 아카데미카 1
이 녀석은 대만에서 만든다고 그러더니, 딱 보니까 예전에 잠깐 불었던 맨체스터 브라스 만든 회사에서 만들었네요. 외관부터 반응까지 그 특유의 느낌이 너무 빼박입니다. 그냥 통짜로 나가는... 뭔가 헐렁한 느낌? 부정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뭐랄까요, 오밀조밀한 밀도나 섬세함 같은게 딱히 느껴지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는데 공명이 나팔 내부에 꽉 찬다기 보다는 여기저기 좀 듬성듬성 비는 듯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독일에서 유학하신 시향 선생님은 아주 칭찬하셨던 기억이 있네요...! 나중에 주문제작하신 수제 나팔도 그렇고, 독일 쪽에선 이렇게 통짜로 빠지는 느낌을 좋아하는지...? 🤔) 깔끔한 만듦새는 흠 잡을 데 없지만, 샤걸 본사에서 직접 제작하는 나팔들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실시간 비교를 안해서 차이를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힘듭니다만, 중급 가격대에서 이 나팔을 고려하신다면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맨체스터 브라스 RL-GB 쪽으로 추천할 것 같습니다. 나팔 자체는 엇비슷한데, 어차피 중급 정도 나팔이라면 가격 차이가 유의미하게 나기 때문에...
샤걸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다음에 므노질 브라스 주자와 디자인한 로만 엠파이어 모델도 온다는데 기회가 되면 후다닥 가서 연주해보고 싶네요. 츄릅... +𝝿+
나팔들을 돌려놓으면서 진열장을 봤는데, 궁금했었던 나팔이 있길래 부탁해서 하나 더 꺼내 불어봤습니다:
존 팩커 (John Packer) JP151 MkII
테일러 트럼펫과의 콜라보, 그리고 이미지 대비 저렴한 가격대로 화제가 되었던 존 팩커 社의 모델이 하나 있더라구요. 지금 검색해보니 중급 모델인거 같은데... 불어보니 딱 그랬습니다. 너무 딱 중급 모델이라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잘 만든 나팔이긴 한데 뭐랄까, 정해진 규격이랑 틀로 바운더리가 딱 쳐진 느낌이에요. 그 정해진 울타리 너머로 어떤 개성이나 표현의 여지가 별로 없는...?
(※ JP Rath 트럼본 소리를 들어보니 이 회사가 원래 좀 단단하게 뭉쳐있는 소리를 좋아하는것 같기도 하네요)
그 외 악기들 이야기:
시연을 마치고 이리저리 악기 얘기를 좀 더 했는데... 에드 사장님이 씩 웃으면서 반 농담으로 '샤걸 쟤네들은 저런 나팔을 누가 사라고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하시더군요. 가격도 그렇게 비싼데 디자인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들이 아니라 워낙 독특해서 참... 웃으면서 맞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다음에 임대받을 (일반적인 디자인의) 로만 엠파이어 나팔 쪽이 더 궁금하다고 사진 보면서 디자인에 대해 같이 이야기 나눴습니다.
제임스 모리슨 모델과 맨체스터 브라스/캐롤의 유사성 이야기를 하니 사장님도 참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고 하시더군요. 실제론 거의 같은 나팔인데 뭐 자잘한 옵션같은거 하나 차이, 혹은 브랜드 차이로 가격 차이도 엄청 나고... 하지만 진짜 독일 장인이 만든 프렌치 혼은 죽이더라 등등...
그래서 저는 무조건 불어보고 사거나, 불줄 아는 사람 데려가서 같이 고르라고 한다면서 예전에 친구 데리고 중고 바하 샀던 얘기도 하고... 요새 바하는 품질관리 문제 좀 나아졌냐고 하니까 여전하다고 하더군요. 언젠가 한번은 고객이 전화를 걸어서 '미개봉' 바하 37 있냐, 꼭 미개봉이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면서 같이 웃었습니다. '아니 뭐 품질관리 좋다고 유명한 브랜드들도 아니고 하필 바하를... ㅋㅋ' 이러면서.
제가 들은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같은 바하라도 미국에서 쓰는건 상대적으로 더 나은 놈들이라고 들었다. 미리 공장에서 거르고... 한국에도 선박이 처음 오면 먼저 시향 주자들이 와서 싸악 불어보고 골라간다고 하더라. 얼마나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니까, '아 그런 얘기는 완전 있을법 한데? 미국이랑... 유럽으로 가는 것들도 꽤 좋을 거야. 미국 내에서도... 내가 아는 사람도 공장에서 다 불어보고 5대 딱 골라서 '얘네들은 어디어디 가게로 보내주쇼' 하고 주문시켰다고 하더라고.'
아마 한국에서도 선생님이 나팔을 골라주거나 아는 사람이 쓰던걸 소개시켜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텐데, 특히나 클래식 계열에서는 더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스트먼 (Eastman) 브랜드도 칭찬하시더군요. 품질관리도 좋고 디자인도 잘 만든다며... 본사는 미국에 있지만 공장은 중국에 있다고 합니다. 어느정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지만서도... 이스트먼, 캐롤, 주피터 등은 중급 브랜드로서 이제 기반을 꽤 단단히 다지지 않았나 싶네요. 확실히 중국의 영향력이 크긴 한가 봅니다. 그 외의 브랜드들도 그렇고, 중국의 진바오에서 만드는 악기들이 굉장히 많나 보더군요.
하여튼 그래서 저는 칼리키오 1S/2는 수리하러 보내고, 그러다보니 한국에는 반라아 오이람 라이트를 부치게 되었고... 칼리키오가 돌아올때까지 한 두어달 가량은 빼도박도 못하고 반라아 BR2 플루겔혼만 계속 불게 생겼습니다 😂 이게 괜찮은 건가, 트럼펫 주법 망가지는거 아닌가 우려도 좀 되긴 하는데, 이것도 경험이려니... 하고 있습니다. 트럼펫헤럴드 게시판에서도 크게 부정적인 의견은 아닌 듯 하고, 스튜어트 선생님한테도 괜찮을지 여쭤보니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하시더군요. 플루겔혼만 가지고 연습을 며칠 해보니 뭔가 깨닫는 것도 좀 있는데... 이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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