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키오 #2 벨을 찾아서 고생길에 올랐었는데, 중고거래에 신물이 나서 생각을 좀 돌렸습니다.
'어차피 제대로 구하기도 힘든거, 느긋하게 생각하고... 이참에 돈도 모였는데 플루겔혼이나 새걸로 사자!'
저는 사실 아~주 옛날부터 '플루겔혼은 이거다!' 하고 마음에 정해둔 모델이 있었습니다. (코넷도...)
에드 트루질로 (Ed Trujillo)라는 세미프로(?) 분의 연주들을 참 즐겨들으면서, 플루겔혼은 이 캔스툴 1525를 사겠노라고 말이죠. 제 머릿속에 '플루겔혼 소리'로 각인된것이 이분의 연주 소리였다고나 할까요. 아직까지도 높은 인기와 명성을 가지고 있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헌데 그동안 생각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막상 새걸 사려고 하니 그랬는지, 검색들을 해보니 좀 더 다양한 모델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현대에 가장 일선에 있는, 혹은 저한테 잘 맞을 제품이 뭐가 있는지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플루겔혼 토막 상식!
※ 시작하기 전에 잠깐 정리하자면, 플루겔혼의 경우는 꾸에농(Couesnon)으로 대변되는 50~60년대 프랑스산 플루겔혼들이 대표적이었습니다. 그 음색이 일품으로 평가받는 반면, 음정과 고음(2옥솔 위쪽) 연주에 약점이 있다는 평가가 보편적이며, 현대의 플루겔혼들은 이런 기술적인 부분에서 진보를 거듭하고 있고, 음색이나 울림 면에 있어서는 굉장히 다양하게 뻗어나가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1. 스코드웰 (Scodwell) 플루겔혼
빅밴드와 라스베가스 씬에서 연주자로 오랜 세월 활동하고, 지금은 제작자로서도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는 토니 스코드웰 옹의 플루겔혼입니다.
벨은 클락 테리 옹이 쓰시던 셀머 플루겔혼의 만드렐을 우연히 구하게 되어 현재 유일하게 사용하는 중이고, 밸브는 캔스툴 제(製)의 쇼트-쓰로우형, 바텀스프링 (즉 짧고, 스프링이 밸브 하단에 장착된) 모델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스코드웰 옹의 이야기에 따르면 일반적인 탑스프링 밸브의 경우 보어가 큰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더군요. 옛날의 유명한 모델들이 바텀스프링을 썼다고도 하고요.
이 모델의 가장 독특한 점은 트럼펫처럼 튜닝슬라이드가 따로 있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음정을 잡기가 훨씬 수월하고, 슬라이드의 트리거도 실질적으론 없어도 되는(!)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전반적으로 옛 프랑스산 플루겔혼들의 디자인 컨셉을 많이 가져오면서도 기술적으로 한층 진일보된 모습을 보여주는 느낌이고, 컴팩트하면서도 장르를 가리지 않는 좋은 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토니 스코드웰 본인도 강조하는 점인데, "어두우면서 fuzzy한 (=보송보송한 / 허스키한) 플루겔혼들은 많다. 나는 맑으면서 fuzzy한 소리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래 저래 많이 신경쓴 흔적이 보이고, 스코드웰의 경우 제작대수가 적지만 일일이 토니 스코드웰 본인이 엄격하게 검수를 하는 듯하고 사용자들의 평가도 아주 좋은 편입니다. 모델들은 옐로브라스와 카퍼 두가지 모델이 있고, 워싱턴의 척 레빈스에서 독점판매 중입니다. (링크)
다만 직접 테스트해볼 기회 없이 눈먼 구매를 해야하는 입장에서, 다양한 리뷰나 소리 샘플 등이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2. 아담스 (Adams) - F1, F2, F5 플루겔혼
그 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이 아담스 플루겔혼들이었습니다. 트렌트 오스틴이 미국 내 총판(?)인 점도 한몫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요새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고, 사용기나 샘플들이 정말 많습니다. F3의 경우 라지보어이고, F4의 경우는 4밸브 모델이라서 배제했습니다만, 이번에 눈여겨본 세가지 모델을 동시에 시연하는 동영상 하나를 첨부합니다:
F1의 경우 아담스가 처음 제작한 플루겔혼답게 심혈을 기울인 듯한 인상이 강한데, 동시에 상당히 이질적(?)인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선 몸체나 소리나 굉장히 가볍습니다. 덕분인지 연주하기에도 엄청나게 편하다는 리뷰들이 많습니다. 톤적인 면도 굉장히 독특한데... 프레디 가비타 (Freddie Gavita)나, 예전에 리뷰한 2016년도의 재즈 연주자들 목록에도 이름을 올린 존 레이몬드 (John Raymond)의 영상들을 보면 아주 매력적입니다. 특히 존 레이몬드의 경우는 제가 생각하는 사운드 컨셉과도 굉장히 잘 맞아떨어져서 고민을 많이 했네요. 현재 미국 사용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자리매김한 모델로 보이는데요, 혁신적인 모델이었어서 등장 당시의 임팩트가 굉장히 컸던 것 같습니다.
F2의 경우는 F1과 같지만 전반적으로 크고 무거운 모델입니다. 170mm / 6.7" 벨크기와 가장 두꺼운 0.55게이지의 골드브라스, 헤비 밸브 섹션을 갖고 있는 모델로, 아담스 모델 치고는 상대적으로 선택가능한 옵션 수가 적은 모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정통적이고 클래시컬한 울림을 보여주는 모델로, Huug Steketee 라는 분의 연주가 아주 듣기 좋습니다.
F5는 아담스의 최신 모델인데, 디자인 측면에서 상당히 많은 변경점이 있습니다. 위의 스코드웰 트럼펫과도 비슷하게 옛 유럽산 플루겔혼들의 디자인 컨셉을 많이 계승한 모델인데, 위아래가 짧게 감겨있고 밸브 섹션도 쇼트-쓰로우 + 바텀스프링 방식에, 추가로 밸브 포트들이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디자인입니다. 트렌트 오스틴이 직접 개발에 참여하였는데, 이런저런 상업적인 연관성을 감안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최고의' 플루겔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상당히 매력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참고로 영어권에서는 함부로 '최고'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습니다. 보통 '최고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하죠.)
아담스의 브랜드 특징이 몇가지 있는데, 하나는 엄청나게 많은 옵션 수입니다. 자신들이 대표적으로 찾은 가장 대중적인 셋업의 경우 '셀렉티드 (Selected)' 모델이라고 하며 (= 스탠다드 모델), 그 외의 경우는 죄다 커스텀 (Custom) 모델로 부릅니다. F2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제공하는 옵션들(보어 사이즈라던가 마감 처리 등)에 더해서 나팔의 재질과 두께, 벨 크기 등 정말 다양하게 입맛에 따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벨 재질중에 니켈 플레어 옵션이 있는데, 투피스벨 제작시 보통 나뉘는 바깥쪽의 펴지는 부분 (= 플레어)을 니켈 재질로 만들어 붙이는 것으로, 상당히 독특한 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어두운 플루겔혼의 특성을 상쇄시켜주는 단단하면서 밝게 퍼지는 느낌을 더해준다고나 할까요.
여기에서 거의 구매하려고 생각까지 하고 한참을 고민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옵션이 너무 많다보니까 고민만 많아지더군요.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팔의 어떤 부분을 다르게 바꾸었을 때의 결과물은 자신과 생각한것과는 다르게 나올 때가 많습니다. 또 한가지 개인적인 불안감을 꼽자면 아담스 특유의 산뜻한, 혹은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하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정말 좋은 브랜드라는 생각입니다. 밸브의 경우도 탑클라스 밸브 전문 회사인 바우어파인트(Bauerfeind)를 인수해서 믿음직하구요.
3. 훕 반 라아(Hub van Laar)의 반 라아 (Van Laar) 플루겔혼
아담스를 알아보다가 다시 생각난 것이 반 라아였습니다. 이번에 중고거래 고생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거래했던 곳이 네덜란드에 있는 가게였는데, 알고보니 이 곳이 반 라아의 네덜란드 공식 딜러더군요. 이번에 모아둔 자금을 이 가게에서 유로로 환불받아야 되는 상황이었어서, 현실적으로도 메리트가 있었습니다. 추가금만 조금 얹어서 같은 곳에 주문을 하면 되니까요.
사실 이번에 약간 독기가 올라서, '기왕 사는거 두어달 더 돈을 모으더라도 최고품으로 사자!'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반 라아의 오이람(Oiram) 시리즈들을 살펴 보았는데...
많군요...
개중에서는 프레수(Fresu) 모델이 눈에 띄었는데, 가만히 보니 오이람 모델들은 공통적으로 헤비형 악기라는 느낌이 있더군요. 너무 크거나 헤비한 악기들은 개인적으로 취향에도 안맞고 불기도 (들기도) 어렵다는 생각인지라 조금 망설여졌습니다.
플루겔혼을 실제로 불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게 생각했던 것과는 실제 불 때 소리나 느낌이 좀 차이가 납니다. 좀 먹먹하다고 해야되나... 그래서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샘플들을 들어볼 때에도 그런 부분을 좀 유의하면서 듣는 편인데, 오이람 모델들을 보면서 '정말 이게 최선인가?' 하고 계속 고민하던 찰나... 오이람이 아닌 일반 모델들까지도 이잡듯이 뒤지다가 보니, 놀랍게도 찾아본 모든 샘플들이 마음에 드는 모델이 있었습니다. 현재 제작 주문이 들어간 상태이고, 아마 한달 정도 뒤에 받아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모델 공개는 그때 하기로 하지요 ^^
반 라아의 경우 독특한 점은 이 곳이 다른 악기(트럼펫)보다도 플루겔혼 제작부터 시작한 회사라는 점입니다. 또 한가지는 같은 네덜란드 제조사임에도 아담스와 거의 반대되는 회사라는 점인데, ①아담스는 제작하는 악기 종류나 규모 등에서 좀더 대기업에 가까운 인상이라면 반 라아는 - 비록 공방은 네덜란드와 독일로 나누어서 운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 좀더 개인화된, 소규모 공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②아담스는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반면, 유럽에서는 반 라아의 인지도가 더 높다고 하구요. ③아담스는 악기 주문시 옵션 선택지가 무한히 많은 반면, 반 라아의 경우는 이번에 이야기해보니 이런 자잘한 커스텀 옵션에 대해서 ~ 물론 원하면 해주기는 하지만 ~ '그 옵션을 그렇게 바꿀거면 XX 모델을 사는게 낫다' 라는 쪽으로 이야기하더군요. 훕 반 라아의 인터뷰에서도 읽은 것인데, 다양한 사람들의 입맛을 맞춰주려다보니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서, 한 모델을 개발할 때에는 소규모의 집단과 진행을 함께 하고, 마지막에는 본인이 완벽하다고 느낄때까지 조정을 한다고 합니다. 즉 각 모델마다 최적의 조합을 맞추어서 내놓는다는 것이죠.
특유의 디자이너적 요소가 강렬한 반 라아의 오이람. | 벨기에의 건축가인 마리오 가자니티의 디자인이다. |
반 라아에서 나팔들을 볼 때 한가지 유의할 점은, 이 곳이 레드 / 로즈 브라스 옵션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하기는 한데... 영어로 이야기하면서 '레드 브라스'라고 했더니 이걸 카퍼(Copper)로 인식하더군요. 반면 반 라아에서 취급하는 골드브라스는 구리의 함유량이 일반적인 골드브라스와 레드브라스의 중간 정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 때문에 주문할 때 한차례 촌극을 빚었네요 하하...^^;
또 한가지는 마감에 랙커가 없고, 실버와 골드, 그리고 백금과 비슷한 팔라듐(Palladium) 옵션이 있습니다. 마감별 가격차이가 꽤 나고, 연주하시는 분들을 보아하니 로브라스로도 충분한 거 같고 해서, 저는 그냥 로브라스로 주문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전화받으시는 아주머님이 참 귀여우십니다(?). 뭔가 푸근하면서도 한땀한땀 할 이야기를 다 해주시는 것이... 그 와중에 한번 묘한 감동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정확한 기억은 안나지만 "악기는 연주자의 내면을 표현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에, 레드 브라스(카퍼)의 소리가 자기 내면의 소리와 부합한다면 그것을 써도 되지만, 레드 브라스는 자기 목소리(개성)이 너무 강해서 소리를 유연하게 바꾸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음악이나 악기, 연주자를 대하는 태도와 식견이 와닿았습니다. 이것은 반 라아의 홈페이지에 남겨진 훕 반 라아 사장의 문구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A brasswind instrument is a handmade product with the highest standards,
but only the performer can elevate it to a work of art."
"금관 악기는 가장 높은 수준의 수제 작업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이지만,
그것은 오직 연주자의 손에 의해서만 예술의 경지로 승화될 수 있다."
- 훕 반 라아 (Hub van Laar)
그 외:
이번 탐색기에 크게 고려대상이 되지는 않았지만, 2000년대 이후의 플루겔혼을 찾으시는 분들께서 고려하실만한 여타 인기 플루겔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바하, 쉴케, 야마하 3대장 브랜드는 제외합니다):
- 인더비넨 (Inderbinen) - 로이 하그로브가 사용했었던, 큼지막한 우드 (Wood) 플루겔혼이 유명합니다. 좀 더 작은 벨의 (하지만 표기무게는 똑같은) Sera 라는 모델도 있는데 틸 브뢰너(Till Brönner)가 사용한다고 합니다. 음상의 폭 / 넓이에 차이는 조금 있습니다만, 둘 다 인더비넨 특유의 나뭇결 느낌이 나는 음색이 특징인 것 같습니다. 우드의 경우 얼마전 한국의 브라이언 신과 박종상 씨께서 리뷰를 하기도 했습니다.
- 테일러 (Taylor) - 특유의 두텁고 묵직한 감성이 있는 브랜드입니다. 일반형인 스탠다드와 곡선형의 팻 보이 (Phat Boy), 그리고 이번에 나온 포켓 플루겔 컨셉의 팻 퍼피 (Phat Puppy)가 있습니다. 팻 퍼피는 벨모양이 신박하게 타원형으로 되어있기도 하더군요. 팻보이의 경우 국내에서는 아마추어 연주자인 차주헌 씨께서 주로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플립 오크스의 와일드씽 (Flip Oakes' Wild Thing) - 스코드웰처럼 캔스툴에서 제조되는 플루겔혼입니다. 풍성하면서도 열려 있는, 현대적이고 범용적인 느낌입니다.
- 이클립스 (Eclipse) - 간간히 이름이 거론되는데 보기는 쉽지 않은 녀석입니다. 몇 안되는 영상들을 보면 연주력이 빼어나고, 밝고 가볍게 불리는 듯한 느낌이 있네요.
캐롤브라스 레전드 | 인더비넨 우드 | 테일러 팻보이 |
그 외 2 -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브랜드 / 모델:
- 콘 빈티지 원 (Conn Vintage One / V1) - 콘의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던 빈티지 원 라인업의 모델입니다. 무겁지 않고 달콤한 음색에, 폭넓고 보송보송한 특성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듯한 느낌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Rufftips 님의 'Hi Kids Flugelhorns.' 동영상을 보면 다른 모델들과 상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 캐롤브라스 (CarolBrass) - 뛰어난 가성비로 유명한 캐롤브라스의 모델들입니다. 자잘한 옵션들에 차이가 있는 6200 모델이 기본형이며, 디자이너 악기스러운 '레전드 (Legend)' 모델이 있습니다. 레전드 모델은 아직 사용기나 샘플이 많이 없습니다만, 기존 모델의 경우 Josh Shpak의 연주들을 들어보면 흠뻑 빠지실 수도 있습니다 :) (상세 모델명은 CFL-6200-GSS-SLB 네요.)
특별 언급: Elephant Flugelhorn
독일의 프리츠 뤼트케와 미하일 T. 오토가 개발한 Elephant 시리즈 악기들 중의 하나인데 디자인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재즈쪽에서 추구하는 어두우면서도 펑퍼짐하고, 보송보송 허스키한 소리를 극도로 추구한 듯한 느낌인데, 한동안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크게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한 것 같네요. 소리를 극단적으로 허스키하게 만들어주는 'Whisper-Penny'라는 제품도 같이 시연하면서 화제가 되었는데... 독일쪽 게시판에서는 호평하는 기록이 남아있긴 합니다만 어째서 잠잠해졌는지 의아하네요. 웹사이트 링크 같이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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