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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생각들

소리가 익다.

by J.5 2008.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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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을 되돌아보면 소리를 잡는데에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수입에 비해 투자도 엄청나게 하고... 이제는 소리가 차분히 자기 자리를 잡고 앉은 듯 합니다. 여기 머무를 시간은 이제 겨우 두달 남짓한데... 안타까운 생각도 들지만 그만큼 많이 배우고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유진어쿠스틱의 네이쳐 차폐트랜스를 구입하고서 알게모르게 느껴진 게 참 큽니다. 전원의 소중함을 몸으로 깨닫게 되기도 하였고... 덕분에 비로소 시스템이 각각 자기 자리를 잡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되기까지도 몇달이었습니다.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단지 '제품을 듣는다'라는 어감처럼 가벼운 것이 아님을 재차 깨닫습니다.

언젠가 친한 동생들이 와서 스피커 한조(AE1 classic)를 기스내놓은 후, 아픈 마음에 다른 한조만을 올려놓고 굉장히 오랜 기간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몇달이 되고나서야 진심으로 이 스피커를 존중할 수 있더군요. 스펜더 s3/5...

단지 귀에 익숙해진 것이 얼마일까... 몇 주 동안 집을 비우면서야 알았습니다. 지금 집의 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너무도 듣고 싶더군요. 그리고 집에 내려와서 다시 한번 세팅을 이리저리 손대보고, 이제야 정말 소리가 익었구나 하는 느낌이 찾아왔습니다.

예전에 모 회사에서 단행한 파격세일까지 감안한다면, Spendor S3/5는 오디오세계에서 가격대비가 가장 뛰어난 스피커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묘한 답답함에 바꿈질을 하려고 비교시청을 하니까, 가장 좋은 소리를 내주는겁니다. 웃기는 녀석... S3/5는 다른 모든 스피커들에 착색이 있다고 느껴지게 할 정도로 무서운 다크포스(?)가 있습니다. 어둡고 절제된 음색에 속기 쉽상이지만 이 스피커는 매칭 환경에 따라 끝간데 없이 중립적이고 투명한 소리를 내줍니다. 나무의 느낌을 닮은 아날로그감(感)을 간직하고 있지만, 진지하게 소리를 대하는 그 엄정한 태도에는 하베스 정도가 아니면 명함을 내밀기 어렵습니다. 단, 이 스피커는 그만큼 세팅을 많이 탑니다. 청자의 태도에 달린 문제인지도 모르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못들어줄만큼 답답하거나 약한 소리라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수준에 걸맞는 대우를 해주고, '소리는 이래야 한다', '이런 소리가 듣고 싶어'라는 욕심을 버리고 듣다 보면, 그제서야 탄복할 수 있는 스피커가 스펜더 S3/5라고 생각합니다.

자금에 여유가 생기려 하니 욕심도 다시 꿈틀댑니다. 토템의 모델원은 또 어떨까. 맨리의 스팅레이, 플리니어스 9200, 하베스...! 생각은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니트, 태그맥라렌 60iRv, 프라이메어 i30, 심오디오 문...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봅니다.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마음을 비우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소리에 귀기울였습니다.

더러는 가장 크게 소리를 좌우하는 스피커에 투자하고, 더러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며 소스기기에 투자합니다. 저는 요즘 정가가 200만원을 호가하는 킴버 3033을 사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합니다. 그렇게 되면... 웃기는 일이지요. 오디오 시스템에서 가장 비싼 파츠가 스피커 케이블이라니!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CDP, 스피커, 앰프가 자기가 가진 소리를 뽐내는 양(陽)적인 부분들이라면, 전원이나 공간, 받침, 케이블 등은 그 전체를 감싸고 정돈해주는 음(陰)적인 것들이라고. 정말 소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고요를 가장 좋아할 줄 알 듯, 기기들에게 애정이 있음에 그 기기들이 가진 재능을 최대한 끌어내 꽃피워보고 싶다고. 오디오에서 그런 음적인 부분들은 자기 소리를 갖고 낸다기보다는, 있는 소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가 자기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처럼, 뒤돌아보지 않을 주변환경을 갖추고 싶습니다. 전 지금 갖고 있는 기기들이 좋습니다. 어디까지 갈지 보고 싶습니다. 성급히 다른 녀석들에게 눈을 돌리기 전에, 하나의 납득할만한 완성을 이뤄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가끔은 내쳤던 리볼버 RW33의 투명하게 하늘거리는, 황홀한 소리가 그립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문득 느껴지는 갈증에 AE1 classic을 걸어봅니다. 아, 시원해... AE와 스펜더 두 놈의 차이는 단순하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열린 소리, 닫힌 소리. 두 놈 다 이쁩니다.

새벽은 좋습니다. 고요하고 차분함에. 소리같은 작은 것도 생명을 갖고 피어오르기에.
끝이 있음을 알기에, 지금 들리는 이 소리가 더욱 더 소중한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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