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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a Playa

여성, 재즈, 트럼펫터

by J.5 2012. 12. 14.

Daniel Krall 그림.

"'여성 재즈 트럼펫터'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왜 없을까?"


먼 옛날 전쟁을 알리던 뿔나팔부터 왕의 행진을 장식하는 팡파레, 근대의 "금관의 꽃" 이라던가 "재즈 악기의 제왕" 이란 수식어까지 - 트럼펫이 갖는 / 주는 느낌에는 일관성이 있다. '선두(先頭)' 혹은 '대표' 악기로서의 지위가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적인 마초이미지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잘 모른다. 트럼펫이 갖고 있는 부드럽고 서정적인 이면을. 화려하고 기가 센 성격에 뒤따르는 고독함 뿐 아니라, 쇠잔함이나 발랄함, 푸근함에 이르기까지- 사실 트럼펫만큼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는 악기도 드물다. 사람들이 트럼펫의 소프트함을 처음 접하고 놀라워하는 일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악기를 규정짓는 만고불변의 특징이 무어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솔직함".


버튼 세 개와 입술, 호흡만으로 이루어지는 그 작동 원리의 원시성 만큼이나, 트럼펫은 참으로 직접적이다. 부는 그 순간의 마음이 그대로 공간에 흩뿌려지는 듯한 느낌. 그것은 기계적이지도, 가식적이지도 않으며, 자신을 어떻게 보이려고 꾸미거나 치장하지 않는다.


숨기거나 속이지 않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이런 솔직함이 여성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면... 수긍할 수 있을까?


재즈 트럼펫의 주체 / 화자로서의 여성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비단 어느 누군가의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아는 '재즈 트럼펫'이라는 개념 자체가, 온전히 남성성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리 모건 - 클리포드 브라운 - 프레디 허바드의 불같은 밥(Bop) 프레이징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케니 도햄 - 쳇 베이커 - 마일스 데이비스의 고요함과 서정성마저도 '남자의' 그것을 ("남자의 고독", 이라던가) 짙게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주자가 가진 개성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 중시되는 재즈의 세계에서 - 그것도 트럼펫으로 - 여성이 무엇을 보여주는지, 전혀 그려지는 상()이 없었다.


전술한 이유들로 인해, 여성이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여성성에 반하는 일이라면, '여성 재즈 트럼펫터'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여성성을 성전환전면부정하는, 반대 극점의 무언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위의 명제가 틀린 것이라면, 그 존재와의 만남은 -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 음악의 새로운 영역에 접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악보에 쓰여진 대로 충실해야 하고, 설령 변주하더라도 패러프레이징(paraphrasing)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클래식 계통의 여성 주자들이 보여주는 남성과의 차이는, 말하자면 뉘앙스 정도의 차이밖에 보여주지 못하지만, 재즈의 바다에서 여성 트럼펫터를 만난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정체성'을 제시한다는 느낌이 아닐까!?



아주 다행스럽게도, 찾으면 찾을 수록 보이는 것이 있었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더욱 기뻤던 것은, 이번 기회에 '여성 재즈 트럼펫터' 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기실, 여성 재즈 트럼펫터에 대한 글을 처음 생각했을 때에는 간단한 소개글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나 스스로 발견해가는 즐거움에 한 사람, 한 사람 씩 차분히 시간을 들여가며, 그녀들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나눠보았으면 한다. 



* 각 아티스트에 대한 글은 이후 비정기적으로 업데이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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