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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펫 & 플루겔혼/나팔

ACB Signature by S.E. Shires

by J.5 2012. 12. 11.

선물로 받은 ACB Shires가 도착했다. 온라인상에서 상당한 인지도가 있는 (한국의 트럼펫샵에서도 지문을 인용한 적이 있다) 연주자 겸 판매자인 트렌트 오스틴이 미국 트럼펫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샤이어 (S.E. Shires) 트럼펫과 함께 약 2년간의 개량을 거듭해 만든 시그너쳐 모델이다. 풀네임은 Austin Custom Brass Signature Model by S.E. Shires 라는 긴 이름이지만, 줄여 부르면 ACB Shires.


사실 오랜동안 관심이 있었던 로울러(Lawler)의 C7을 구입하고 싶었으나, 로이 로울러와 이메일을 주고받던 중 아무래도 실제로 불어보면서 스펙을 정하기까진 섣불리 트럼펫이 어떻게 나올지, 정확히 예측하기에 난점이 있었다. 이메일 교류가 멈춰있었고, 새벽에 전화를 걸어보니 휴가를 갔던 차,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 기간을 노려 이곳 저곳을 둘러보던 중 이 녀석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빈티지스러운 디자인과 마감, 트렌트 오스틴과 샤이어에 대한 믿음, 악기의 희소성 (트렌트 오스틴은 현재 아담스 트럼펫과 파트너쉽을 맺은 관계로 더 이상 샤이어 트럼펫을 내놓지 않는다), 그리고 녹음 샘플을 들어보고선 훅 꽂혀서 질러버린 트럼펫이다.


Donna Lee


Chelsea Bridge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과는 이래저래 조금 다르지만, 정말 끝내주는 트럼펫이다.


ACB 샤이어의 소리는 프렌치 혼을 밀도감 있게 압축시켜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꿈꾸는 소리에 비하면 울림의 퍼짐/잔향감이나 허스키함이 부족하지만, 컴팩트하고 심지가 잘 살아있으면서도 소리의 전 스펙트럼에 걸쳐 포근하면서도 꽉 찬 듯한, 달콤하고 부드러운 배음을 들려준다. 강하게 밀어붙여 보아도 이런 온화한 성품은 살아있어서, 날카롭거나 공격적인 느낌을 연출하기 보다는, 말하자면 권위감이 느껴지는, 힘이 깃든 소리를 표현해낸다. 코니컬 보어와 프렌치 비드를 적용해서일까? 마우스피스를 바꿔 끼워봐도 소리의 특성 자체가 크게 변화하지는 않는다.



음색이나 울림이 기대와는 약간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불면서 계속 감탄사를 연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나팔이 보여주는 악기로서의 완성도에 있다.


우선 컨트롤에 대한 반응이 기가 막히다. 블로잉이 요즘 들어 익숙해진 캔스툴 1502와 비슷해서 그런지 곧바로 적응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기존 타이밍에 립슬러를 넣어보면 그 변화를 바로 받아들이는 탓에 음정이 박자보다 미세한 차이로 빠르게 들어간다. 연주 도중에 떠올린 다음 음이 소리로 표출되기 까지의 갭이 거의 없다고나 할까. 음 전환이 신속하면서도 부드럽게 이루어지며, 매끄러운 이음매와 곧은 음정 덕분에 소리가 뭉개지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불규칙한 타이밍에 '퍽' 하면서 슬라팅(slotting) 되는 일이 없다.


전 음역에 걸쳐서 음색과 반응이 균일하고 곧다는 것도 굉장한 점. 1옥타브 밑으로 내려가든 3옥타브 위로 올라가든, 약하게 불든 강하게 불든, 특유의 두텁고 달콤한 음색과 매끄럽고 정확한 슬라팅이 고스란히 유지되며, 미세한 표현이나 뉘앙스 역시도 놓치지 않고 반영해준다. 결과적으로 이 나팔을 잡고 불고 있다보면, 이 악기가 나를 배신하지 않을거라는, 내가 의도하고 연주하는 그대로 가 준다는 강한 신뢰감과 안정감이 생긴다. 트럼펫이 연주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만듦새와 조작감도 일품이며, 무게 역시 묵직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적절한 스탠다드 형이다. 음색이나 블로잉은 개인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영역이지만, 악기 제반에 걸쳐진 품질과 품격, 악기로서의 견고함과 완성도를 보면 ACB Shires 트럼펫은 내가 여태껏 입을 대어보았던 모든 나팔을 통틀어봐도 최고급의 물건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p.s.

-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스포츠카의 성능을 갖춘 유럽의 고급 중대형 세단.

- 아직은 막 박스를 열어본, 소위 "허니문 기간" 중이니 감안하시길! (게다가 코니컬보어 / 프렌치비드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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