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글래스퍼 (Robert Glasper) 공연에 다녀왔습니다
시드니에는 '메트로'라는 차세대 전철이 있습니다. 10년도 넘게 천천히 공사하고 있는데, 최근에서야 시내까지 이어지는 노선을 완공하고 이번주에 개봉했습니다. 타고 도심까지 가본 것은 처음이네요.
이번 공연은 음대 앙상블 쪽 친구들에게 얘기를 듣고 같이 보러 가게 되었습니다. 공연 전에 미리 만나서 같이 간단하게 저녁을 먹기로... 시내 웨스트필드 백화점의 잇푸도(Ippudo)라는 라멘 집을 가기로 했는데, 마감시간이 다 됐다고 해서 백화점 내 푸드코트로...
이번에 공연이 열린 시티 리사이틀 홀 (City Recital Hall) 이라는 곳은 처음 가 보았는데, 모던하면서도 전통적인 멋을 살린 감각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구조적으로 큰 개념은 고전 극장을 따랐지만 (중앙에는 보시다시피 홀이 있고, 저 사진을 찍은 곳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인데, 흰 대리석으로 이루어져있고, 반층 올라가서 양쪽으로 둥글게 나뉘어 올라가는... 그야말로 고전적인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객석에 앉은 뒤부터 본 공연까지의 체험은, 유튜브에서만 봐오던 뉴욕의 아폴로 극장이 약간 이런 느낌일까 싶더군요. 시티 리사이틀 홀 자체는 포멀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캐주얼+세련됨이 적절히 뒤섞여 있었는데, 공연 도중의 분위기는 뭐랄까요, 반쯤은 클럽이나 라운지 바 스러운, 좀더 왁자지껄하고 민중적인(?) 분위기였습니다. 백팩같은 건 보관소에 두고 가야하지만, 바에서 가볍게 와인이나 위스키를 한잔씩 사서 들고 들어가는 분들도 많고. 이런 분위기의 공연은 처음이었어요.
공연을 시작하고 나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뭐랄까... 피아노가 말을 하더군요. 피아노 공연을 자주 간 건 아니지만, 분명히 달랐습니다. 지금까지 봐온 피아노 연주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연주자는 연주자이고, 피아노는 사람이 다루는 도구로서의 구별된 존재로 느껴졌는데, 그냥 로버트 글래스퍼의 아우라와, 몸 같은 것에 피아노도 한덩어리인것 같은 느낌? 그냥 사람이 말하듯, 흥얼거리듯... 우리가 성대로 아무 생각없이 그냥 내고 싶은 소리를 내잖아요. 로버트 글래스퍼는 그냥 그런 식으로, 머리에 지나가는 소리를 자연스럽고 본능적으로 그냥 소리로 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트럼펫이란 악기를 다루는 것을 스포츠에 곧잘 비유하곤 하는데, 음악도 경지에 이르니 운동보다는 무공에 가깝구나 싶더군요.
이는 로버트 글래스퍼 본인의 존재감이나 음악 스타일하고도 다 이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멜로딕하다거나 어떤 일반적인 (ex. 대중가요) 틀에서 벗어난 음악과 공연 진행... 실제로 보니 상당한 거구인데, 안방 소파에 잠시 나와 앉은 듯한, 여유롭고 자연스러운 느낌. 무엇 하나 서두르거나 조급한 것 없이 느긋해 보이면서도 몰아칠 땐 몰아치고... 마치 그의 음반 타이틀인 '블랙 라디오'인 것 마냥, 그냥 음악 소리를 마당에 풀어놓는 느낌...? 치고 싶을 땐 치고, 안 치고 싶을 땐 안 치거나, 심지어 잠깐 일어서서 나갔다 오기도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공연장부터 객석 분위기, 공연 내용까지 새로운 것들이 한가득이었네요. 보컬은 그냥 악기의 하나처럼 음원으로 피처링되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의 정형에 갖혀버린 음악이란 것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완전히 자기 느낌대로 새로운 틀을 만들어낸 듯한 느낌인데, 사람이 곧 음악이 된 느낌이랄까, 아니면 음악이라기 보다도 '음악적인 소리가 살아 움직인다'랄까...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참 유기적이더군요. 어쩜 음악을 이렇게 할 생각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
이 사람 공연은 라이브로 보고 들어야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음반으로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감지되는 그 특유의 느낌을 받을 수가 없어서 굉장히 다른 느낌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형적인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느껴지는 소리나 에너지감은 굉장히 생생합니다만, 듣는 사람에게 다이렉트로 뭔가를 호소한다거나 주고받는다기 보다는, 정말 라디오처럼 그냥 그 순간 그 공간에 흘러가는 소리들같은 느낌이 확실히 듣는 입장에서 접근이 편하지는 않더군요. 기승전결스러운 느낌이 별로 없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앉아있던 곳이 위층 벽면, 스피커 바로 옆이라... 공연이 시작되고 한 5분~10분이나 되었을까, 그때부터 손가락으로 귀의 이주 부분을 눌러서 반쯤 막아가면서 들어야 했습니다. 옆에 앉은 친구들은 (참고로 저는 공연 얘기를 뒤늦게 들어서 혼자 아예 다른 구역에 앉았습니다. 주변엔 생판 남들만...) 처음부터 예상한건지 이어플러그를 가져와서 끼고 듣더군요;; 귀아프면 이거 끼우라고 친절히 저한테도 하나 주더라는...😂
공연을 가서 라이브 연주를 자주 들어야 한다는 것은 뭐랄까요, 자주 듣는 얘기기도 하고 이해도 가고 하지만 크게 와닿지는 않았던... 관념적으로나 알고 지내온 얘기인데, 조금씩 더 흥미를 붙여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침 같은 곳에서 다음달에 제임스 모리슨 쿼텟 + 마리안 페트레스쿠 (Marian Petrescu) 공연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