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마하기/근황, 일상다반사

나팔 취미가(家) 이야기 #2: 방황과 흔들리는 20대

J.5 2024. 7. 29. 01:22

1부에 이어서.

이 곳에서는 대학을 등록하고 한 달 내로 취소하면 등록금을 돌려받을 수 있고, 수능 성적을 1년 뒤까지 그대로 쓸 수 있습니다. 덕분에(?) 그 한 해는 사람 공부를 해보자 하면서 알바도 해보고,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열심히 놀기도 하면서 보냈지요.

다시 대학을 신청할 시기가 왔는데, 호주에서도 디지털 미디어 등의 학과가 새로 생겨나기는 했지만 순수미술에 가까웠던 시각디자인 공부에 데었던 저는 IT 계열을 1지망으로 넣었는데, 이게 또 덜컥 됩니다. 그런데 어째선지 머리속에는 '대학 들어왔으니까 이제 놀자' 라는 아주 한국적인(...) 생각이 있었고, 졸업은 했지만 성적은 좋지 못했습니다. (적성 면으로는 잘 맞았는데 열심히 하지 않은게 조금 아쉽네요🥲) 어찌 할까 고민을 했는데, 마침 시각디자인을 했던 대학에서 애니메이션 석사 과정이 막 새로 생겼더군요. 마음이 동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데도 없고, 처음 꾸었던 꿈에 재도전하는 상황. 석사 과정은 열심히 했습니다. 성적도 잘 받았구요. 학기 막바지에는 아마 2주 동안 총 3시간만 자면서 작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졸업작품을 구상하는데 주인공이 나팔을 부는 아이였습니다. 그냥 정말, 어째선지 특별한 이유 없이, 그렇게 됐어요.

석사를 마치고 준비했던 포트폴리오...

그런데 트럼펫을 그리려고 이미지를 검색해보니까 한계가 너무 뚜렷한 겁니다. 모델도 제각각이고, 사진 각도도 다 정해져 있고 말이죠.

그래서 약간, 이때다 싶은 마음으로 생각했죠. "이렇게 된거, 그냥 하나 사자!"

당시 신세를 지던 친구 집에서 한 정거장 옆 동네에 꽤 큰 뮤직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열심히 검색하다 보니 예전 모습이 좀 남은 사진이 있더군요.

Dickson's Music... 예전에는 앞쪽 가게 공간도 여기에서 쓰지 않았었나 싶네요.

올라가서 가게를 들어가니, 카운터 앞 공간에 야마하 1335와 바하 600이 수북이 쌓인 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트럼펫을 사고 싶은데 뭘 사야될지 모르겠다 여쭤보니, 앞에 놓인 두 모델에 대해 간략한 설명은 들었는데 감은 안 오고... 그러고 있으려니 연세가 지긋한 사장님께서 인자한 눈빛으로 물어보셨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부는 지는 아니?"

모른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가르쳐주시더군요. "엠" 하고 후~ 불어라 라구요. 그리고 불어보라며 바하를 건네주셨습니다.

처음엔 감을 못 찾아서 바람 빠지는 소리나, 찌뿌둥한 소리를 순간순간 내면서 갸웃갸웃 했지만, 몇 번 해보니 어느 순간, 두터우면서도 포근한 (당시 느낌으로) 1옥 도 소리가 가게를 가득 메우더군요.

바암ㅡ

 

와... 순간 눈앞에 별이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사진 필터를 먹인것처럼 눈 앞의 광경이 꿈결같고 반짝반짝하는 그런...? 황홀하다는 표현이 이런 거겠지요. 사장님이 싱긋 웃으면서 "너 암부셔가 좋구나" 하시더군요. 그때는 암부셔가 뭔지도 몰랐지만(...)

다른 손님들도 있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이 쓰일 리가 없었습니다. 손님들도 뭔가 신기했는지 순간 모든 이목이 저에게 모여있었고, 저도 "와! 이거 봐!" 하는 기분? 그리고선 신나서 야마하 1335도 불어봤는데... 윽 이게 뭐야. 떼떼거리는 소리에 바로 내던지고, 바하 TR600을 그 자리에서 구매했습니다. 물론, 저에게 트럼펫은 오랫동안 불어보고 싶었던 악기였기 때문에,

"저... 혹시 혼자서 연습하기에 괜찮은 책이 있을까요?"

라고 사장님께 여쭤보니, 책장으로 저를 데리고 가서 친히 골라주시는 책이 있길래 같이 구입했습니다.

『불면서 익히는 트럼펫 & 코넷』 - Peter Wastall

그리고 친구 집에 가서 두근거리며 첫 개봉을 하며 찍은 것이 1부 첫머리의 사진입니다.

그 당시 머물던 친구네 집. 새삼 추억이 새록새록...

나중에서야 안 것이지만 저는 나팔 시작이 꽤 순탄한 편이었습니다. 교본에 써진대로 연습하면서 바로 불었거든요. 몇 주 되지도 않아서 동네의 로컬 악단에도 찾아가 보았는데, (밴드에 민폐인 것 같아서 한 번만 가고 다시 가진 않았지만...ㅠ) 그 뮤직샵의 지긋한 사장님이 밴드마스터시더군요. 여튼 그래도 얼마 안되어 간단한 곡도 불고, 악보에 없는 「플라이 미 투 더 문」 같은 것도 혼자서 익혀서 불고 그랬습니다. 마구잡이 잡초 주법의 원흉...? 하지만 레슨같은 걸 받을 상황은 전혀 아니었죠.

트럼펫을 처음 구입했던 이 때는 대학원의 정규 과정은 마쳤는데, 졸업 작품이 제대로 완결되지 않아서 한 학기 더 연장하고 작업을 하던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도중에 준비하겠다고 휴학한 기간이나 이후에 일한 시기까지 다 더하면, 학사 졸업 이후 서른 무렵이 될 때까지의 시간은 오롯이 애니메이션에 충실했던 기간이었습니다. 덕분에 인디 애니 업계 분들과도 접하게 되고... (지금은 유명인이 된 연상호 감독님하고 술도 먹어봤네요 하하.)

석사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한국에 있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코디네이터(새끼PD)로 근무도 했었는데, 그때도 틈틈이 회의실에 혼자 들어가서 포켓트럼펫도 불고 그랬네요. 지금 생각하면 무슨 정신나간 짓이었나 싶기도 한데(...) 아마 저도 주로 야근 시간에나 눈치껏 불었을 테지만, 다른 직원들이 있을 때도 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다들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뭔가 서로 짠한 마음으로 바라봤겠구나 싶기도 하네요. 같이 일했던 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

귀국 후, 스튜디오 취직 전... 짬짬이 번역 일을 하면서 향후 진로를 고민하던 시절. 이 무렵에 베누스토에도 가 보고, 트럼펫터 모임도 궁금하여 인천 전국정모에 (지부)비회원 소속으로 처음 가보고, 서울 교육반에도 등록해서 다니고 그랬습니다. 열심히 활동했죠.

그렇게 애니메이션 회사를 다니다가 생각과는 많이 달랐던 현실에 부딪힐 즈음, 자매회사였던 미국 스튜디오의 말장난(?)에 이적이 어그러지면서 저는 한번 더 붕 떠버리는 처지가 됩니다. 여기에 관해 자세히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국→미국 이직 사이에 잠깐 들린다 생각했던 호주에서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려 난감했던... 돌아간 김에 활로를 모색해 볼까도 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부족했고, 세계경제공황 시기였기도 하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저는 당연히 기존에 다니던 애니메이션 회사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회사에서는 작품을 다 안끝냈으니 경력을 인정해줄 수 없다 하고... 보다못한 아버님께서 한 마디 하십니다.

"지금까지 해온거에 비해 결과가 너무 없는데, 차라리 예전(휴학시기)처럼 원어민 교사로 일하면서 차분하게 진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냐?"

그리고 그렇게, 저는 전라북도 군산으로...

트럼펫 구입부터 베누스토, 트럼펫터 서울지부까지 애니메이션과 함께 한 시기를 초기라고 본다면, 첫 꿈을 내려놓고 좀 더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되는 2막이 이때부터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리저리 배우러 다녔던 이야기와, 밴드 활동에 관한 이야기 정도가 남은 것 같네요.


돌아보면, 20대에 들어서부터는 정말 방황을 많이 했구나 싶습니다.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겠구요. 저는 어릴적부터 무언가 하나에 온전히 매진하는 삶을 당연스럽게 여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심이 잡히면 삶의 나머지 부분들은 거기에 맞추어 차곡차곡, 자연스레 맞춰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중심이 되는 그 길이 어디일지 갈피를 잃으면서, 삶의 나머지 것들도 자리를 잡지 못한고 불안정한 상태로 이어져 온 것 같습니다.

한 타임 정도 다른 이야기로 쉬고 3부로 다시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